설계-시공 분리발주 방식으론 설계모델 시공단계에서 활용 어려워
내년부터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 시행이 예고됨에 따라 BIM(빌딩정보모델링)의 사용범위 확대가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BIM 시장의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설계사가 작성한 BIM 모델을 시공사가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한 만큼 500억원 이상 건축물의 계약방식을 변경하거나 설계사들에 대한 BIM 용역 발주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31일 현장에서 BIM을 활용하는 관련 업계 관계자들은 일본 등 선진국과 유사한 시점에 도입했지만, 현재 시장에서 BIM 활용 만족도는 크게 떨어지는 상황이라며 관련 기술의 활용 방법과 인프라 기반을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정배 코스펙빔테크 대표이사는 “우리나라도 해외 선진국들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국내 BIM 활용 기간도 5~6년으로 기술이나 경험적 측면에서 다른 국가와 큰 차이가 없음에도 BIM 활용의 기대효과가 다른 국가보다 현저히 낮은 상황”이라며 “건설사들에 BIM 비용 투입 대비 효과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효과가 없다’고 답한 것은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 韓 건설사 52% “BIM 효과 없다” 응답
세계적인 BIM 전문기관인 맥그로힐이 작년 12월 ‘주요 BIM 활용국 건설사의 BIM 활용가치 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체감 효과가 9위로 가장 낮다.
‘투입 대비 효과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은 52%에 달했고, ‘투입 대비 효과가 매우 좋다’고 응답한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보통’이라는 답변은 36%였다.
총 9개국을 상대로 실시된 조사에서 BIM 비용 투입 대비 효과가 가장 좋다고 응듭한 국가는 일본과 독일, 프랑스였다. 이들 3개 국가의 만족도는 97%에 달했다.
이어 캐나다(87%), 브라질(85%),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78%), 미국(74%), 영국(59%) 순이었고, 우리나라는 만족도 48%를 기록하며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
눈에 띄는 대목은 BIM 활용 만족도가 1위인 일본과 우리나라의 BIM 도입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맥그로힐은 우리나라와 일본 건설사들의 BIM 이용기간이 거의 유사하게 겹치는데 두 국가 모두 조사 결과 3~5년 전에 도입했다는 응답이 55%로 가장 많다고 밝혔다. 11년 이상 사용한 비율은 3%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BIM 사용 기간과 지역적 특성 등이 유사한 우리나라와 일본의 BIM 만족도는 왜 이렇게 큰 편차를 보인 걸까.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꼽는다.
BIM 활용 기반과 BIM 인프라, 프로젝트 수행방식이 일본과 다르다는 거다.
BIM 도입 전에도 일본 건설사들은 3D 기반의 캐드(CAD)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BIM 체제로 자연스럽게 전화할 수 있었고, 이 덕분에 BIM 투입 비용 대비 기대효과가 높았다.
특히 10여년 이상 3D 기반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 축적량도 상당했다. BIM이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되려면 작성 모델의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건설 IT 시스템과의 연계가 필수적인데 우리나라는 소수의 건설사만 IT 체제를 구축한 상태여서 건설사가 BIM을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가장 큰 문제는 프로젝트 수행 방식의 차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BIM 적용방법이 BIM의 특징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에 매우 어렵다”며 “연구에 따르면 BIM 활용효과는 설계와 시공이 통합 방식으로 진행될 떄 가장 좋은 효과를 내는데 우리나라는 설게와 시공이 분리되어 있어 설계사에서 설계 모델을 작성하더라도 시공에서 활용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경우 건설사가 주관해 설계와 시공을 함께 수행할 수 있어 설계 단계에서부터 시공을 고려한 모델을 만들고, 시공의 적용 결과와 노하우가 다른 설계 모델 작성 시에 활용되기 때문에 BIM의 활용 효과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 BIM 설계도, 시공에서 활용 못한다?
현재 건설시장에서 BIM의 활용 효과가 저평가되는 가장 큰 이유는 설계 단계 BIM 도면의 정밀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김정배 대표는 “건설사들이 BIM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건설 프로세스 진행에서 설계 시 구축된 BIM 모델의 시공 활용도가 높아야 한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BIM 관련 세미나에서 항상 동일하게 지적되는 사항이 설계사 입장에서 만들어진 설계 모델을 시공에서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발주처의 요구를 반영해 만든 설계 단계의 납품용 모델 자체가 시공에서 활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못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발주처의 BIM에 대한 이해도 부족 탓이 크다.
업계 관계자들은 잘못된 계약 방식과 낮은 설계비, 그리고 촉박한 설계 기간, 고착화된 설계·시공 분리 발주로 인한 설계사의 시공 이해 부족, 기술적 한계 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시공 단계에서 활용 불가능한 설계 모델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한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작업 도구만 2D에서 3D 체제로 바꾸었을 뿐 계약 방식과 설계 대가, 불명확한 업무 지시 등의 관행은 2D 방식 그대로”라며 “현재 설계사 중에 선진국 개념의 BIM 도면을 그릴 수 있는 업체는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된다. 발주처의 BIM에 대한 이해도 역시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고 털어놓았다.
게다가 설계자들이 BIM에 익숙하지 않아 2D형 캐드에 BIM 소프트웨어를 병행하며 작업하다 보니, 시설물 정보가 흩어져 BIM의 취지를 살리기도 어렵다.
BIM 전문 외주업체들은 “설계사가 납품한 BIM 데이터에 모델만 있고 도면이 없는 경우가 많고 이렇게 남품된 2D 도면과 BIM 모델이 일치하지 않아 도면을 기준으로 모델을 신규 작성하거나 아예 대폭 수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BIM 시장 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발주 방식의 전면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2014년 2월 우리나라에 출간된 BIM 업계의 대표서적인 이 제일 먼저 건설 프로젝트 계약 방식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관련 전문가는 “이 책은 설계시공 분리 발주 방식이 시공자의 설계 과정 참여를 막는 탓에 설계가 완료된 후에 완전히 새로운 BIM 모델을 만들어야 해 효과적인 BIM 활용이 어렵다고 밝힌다”며 “디자인빌드 방식과 책임형 건설사업관리(CM)가 BIM 활용도를 높일 수 있는 발주 방식으로 꼽힌 점을 감안해 우리나라 발주처들이 500억원 이상인 BIM 의무 적용 대상 건축물의 발주 방식 개선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최지희기자
- 건설경제 <뉴스&>면 발췌 -